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스몬 왕조 (문단 편집) === 마지막 부활 시도와 실패 ===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 편에서 권력을 확대해나가다가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가 집권하게 되자 재빨리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 편에 섰고 카이사르에게 막대한 뇌물을 갖다바치고 [[이집트]]에서 곤경에 처한 카이사르에게 병력을 보내 그를 도움으로써 카이사르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에 이른다. 히르카누스 2세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설득해 카이사르에게 안티파트로스를 유대 통치자로 삼아줄 것을 호소해 결국 안티파트로스는 유대의 통치자가 되기에 이른다. 한편 로마에 끌려간 아리스토불로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유대 통치자의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며 카이사르에게 나섰지만 이미 안티파트로스에게 구워삶아진 카이사르는 외면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장으로 임명하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등 유대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두 아들중 장남 파사엘은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장관으로, 차남 [[헤로데 대왕|헤로데]]를 [[갈릴래아]]의 행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로마의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안티파트로스도 독살당하고 팔레스타인의 권좌를 놓고 파사엘과 헤로데가 분쟁을 벌였다. 헤로데는 신속하게 로마의 돌아가는 판국을 주시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안토니우스]]에게 재빨리 붙어서 권력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하스몬 왕조의 복권을 노렸다. 마침 반카이사르 파의 책동으로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이 일어나자 그는 사두카이파들을 규합하고 파르티아의 후원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로 왕위에 올랐다. 히르카누스 2세는 다시는 대제사장-왕 직에 오르지 못하게 귀가 잘린 후 파르티아로 끌려갔고, 파사엘은 파르티아군에게 붙잡혀 죽었으나 헤로데는 겨우 [[마사다]]로 피신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는 자신을 왕으로 새긴 동전을 발행하는 등 왕권을 행사했으나 곧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헤로데를 구해줌으로써 안티고누스의 하스몬 왕조 부활 시도는 끝장나고 만다. 결국 기원전 37년, 안티고누스는 붙잡혀 처형되고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하면서 하스몬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